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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_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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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2-23 17:09 조회4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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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차별, 좌절된 청년 무관의 꿈

- 1915년 대한성리교 창설
- 1919년 대한신민단 단장,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위원장
- 1921년 대한의용군사회 고문
-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1904년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통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함경도 출신 학생들을 차별했다. 무관이 되어 조국 부강을 염원했던 선생의 꿈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조선총독부 종교탄압에 반발, 민족교회인 대한성리교 설립

○1905~6년경 기독교인이 되었다. 선생이 기독교에 입교한 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을 통해서 무너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907년 훈춘(琿春)으로 망명한 선생은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3 · 1운동에 호응하여 독립군 단체인 대한신민단 조직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청년들을 독립전사로 양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1914년 이동휘와 함께 중국에서 설립한 동림무관학교를 들 수 있다.

○독립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하려는 선생의 노력은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결성으로 이어졌다. 3 · 1운동에 호응하여 결성된 대한신민단에서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여기서 보여준 그의 헌신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한중(韓中) 연대를 통해 일본제국 타파 시도

○1925년 2월 중국 전역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목격한 선생은 한중연대를 통해 일본제국을 타도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24년 윤자영과 함께 상해에서 조직한 상해청년동맹(上海靑年同盟)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게 되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 전개에 한계를 절감한 선생은 연해주로 갔다. 1933년 빨찌산위원회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지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모스크바로 피신한 후 더 이상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러시아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을 하지 못한 채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김규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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